여성복 44 사이즈가 실상은 55 치수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는 지금, 미국의 패션업계에도 소비자의 ‘허영심’을 자극하는 사이즈 마케팅이 횡횡하고 있다. 쇼핑을 하는 즐거움을 빼앗아가는 치수에 공포감(!)을 교묘하게 파고든 사이즈 눈속임 작전은 제품에 표시된 사이즈는 10년 전과 똑같지만 실측 지수는 과거보다 훨씬 큰, 말 그대로 ‘눈속임’ 사이즈로서 소비자들이 자신의 몸이 여전히 날씬하다, 혹은 체중이 증가하지 않았다는 착각을 갖게 만들어 소비를 촉진시키는 일종의 ‘비위맞추기’ 표기법이라 할 수 있다. <예정현 기자>
실제로 많은 미국 하이스트리트 라벨들이 사이즈와 부위별 실측 지수를 확인해본 결과 10년 전과 같은 사이즈지만 실측 허리치수는 3인치나 늘어난 경우가 허다한 것으로 밝혀졌고, 프렌치커넥션(French Connection)의 특정 남성 진의 경우 사이즈는 그대로인데 실측 허리 치수는 6인치나 큰 경우도 있는 것으로 나타나 치수에 민감한 소비자의 심리를 활용한 교묘한 사이즈 마케팅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비위 맞추기 마케팅
그렇다면 왜 어패럴 업체들이 이 같은 속임수 마케팅을 펼치고 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이 같은 ‘사이즈 속임수’가 소비자들에게 먹혀 들기 때문이다. 날씬하다 못해 깡마른 모델들이 패션계를 점령하고 거식증이 있는 자의 ‘패션 병’처럼 되어버린 시대다. 스타일을 좀 안다 싶은 멋쟁이라면 00사이즈(한국 44사이즈)를 입어야 될 것처럼 ‘날씬이 강박증’을 일으키는 사회 속에서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소비자들이 마음 놓고(!) 옷을 구매하게 만들려면 가능한 표기된 사이즈는 작아 보이게, 실제 치수는 크게 해놓아야 이들의 치수 불안증을 해소시키며 구매를 촉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지난 50년간 미국 여성들의 평균 허리치수는 27-34인치로 늘어났지만 사이즈 표식은 오히려 더 작게 표기되고 있다.
물론 옷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은 이 같은 변화를 눈치 채고 있으면서도 “몇 년 째 같은 사이즈를 입고 있다”는 얄팍한 만족감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있지 않다. 결국 업체나 소비자들이 서로 알면서 속고, 속아주는 묘한 관계가 성립되는 셈이다.
이와 같은 ‘사이즈 눈속임' 일명 허영의(vanity) 사이즈는 단순히 여성들을 타겟으로 한 것만은 아니다. 막강한 소비력과 함께 막강한 사이즈(?)를 자랑하는 소비자들이 많은 미국 시장에서 다수의 소비자들을 상대로 하는 하이스트리트 라벨들이 먼저 여성복 부문에 사이즈 눈속임을 시작했지만 이는 곧 남성복과 심지어 아동복 부문까지 확장되고 있는 추세에 있다.
전문가들은 디자인에 따라 같은 사이즈라도 1-2인치 정도 치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지금의 ’사이즈 눈속임‘은 치수는 늘리되 사이즈만 그대로 표기, ‘날씬해 보이는 착각’을 유발시키는 상술에 불과하다면서 차라리 치수를 더 다양화시키는 편이 진정 소비자를 위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매출이 아쉬우면서도 이미지 때문에 돈 되는 사업이 분명한 빅 사이즈 사업에 뛰어들기를 주저하고 있는 많은 브랜드들의 경우 소비자의 반감을 사기 쉬운 사이즈 늘리기 보다는 기존의 사이즈를 유지하되 치수만 슬쩍 늘리는 쪽이 소비자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고 매출을 늘릴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소비자들 또한 자신이 비만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되는 ‘빅 사이즈‘를 구입하는 것보다는 스스로를 속이더라도 ’눈속임 사이즈‘를 통해 심리적 안정을 얻는 경향이 높아 소비자와 업체간에 암암리에 묵인된 눈속임 사이즈가 중단될 확률은 거의 없을 듯하다.
허영의 사이즈, 패션계의 계급 들어내나?
현재 허영의 사이즈를 표시하고 있는 리테일러는 「H&M」, 「톱숍」, 「자라」, 「갭」, 「올드네이비」, 「제이크루(J. Crew)」, 「DKNY」등으로 「캘빈클라인」 진 사이즈 10을 입는 소비자가 「갭」에서 데님을 구매하려면 6 사이즈를 , 사이즈 6 「앤클라인(Ann Klein)」스커트를 입는다면 나인웨스트(Nine West) 매장에서는 4 사이즈 스커트를, 또 「프렌치커넥션(French Connection)」에서는 비슷한 스커트를 2사이즈로 구매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빅(Big)이 스몰(Small)이 되는 변신이 가능한 셈이다.
일례로 영국의 하이스트리트 체인 「톱숍」의 경우 25인치로 표기된 진의 실측 허리 치수는 27인치고, 「프렌치커넥션」의 30인치 슬림핏 진의 허리 치수는 36인치, 32인치는 실제로 27.5인치, 여성용 부트 플레어진의 허리사이즈는 26사이즈가 실측 허리 치수가 30인치, 「자라」의 남성용 레귤러 핏 진의 경우 32인치 사이즈가 실제는 36인치인 것으로 나타나는 등 하이스트리트 라벨의 사이즈 눈속임은 그저 인심 좋은 정도를 넘어섰다.
이밖에 28인치로 표기된 「갭」여성용 슬림핏 진의 실측 치수는 31인치, 「리바이스」레드탭(Red Tap) 야성용 부트컷 진 28인치의 실제 치수는 29인치, 「베네통」여성용 진 28인치는 사실 29인치, 「휴고보스」 바투2(Tabu 2) 여성용 블랙 트라우저 28인치는 사실 31인치 등으로 나타나 사이즈 눈속임을 찾지 않는 편이 오히려 빠를 정도다.
재미있는 사실은 많은 하이스트리트 라벨들이 허영의 사이즈 마케팅에 동참한 것으로 나타난 반면 하이엔드 디자이너나 럭셔리 디자이너 브랜드들의 경우에는 오히려 사이즈가 그대로 이거나, 실측 지수가 더 작아진 것으로 나타나 ‘허영의 사이즈’가 패션계에 공공연히 자리하고 있는 패션의 계급을 구분하는 장치가 된다는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이들 업체는 이 같은 사이즈 표기법은 소비자를 호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체적인 사이즈 표기법에 따른 ‘일관된’ 사이즈 정책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이즈를 다양화시키거나 빅 사이즈를 추가해달라는 소비자들의 요구를 오랫동안 무시해온 업체들이 교묘한 사이즈 표기법으로 소비자들을 매장으로 유인, 매출로 이끄는 심리전을 펼친다는 비난을 피해갈 수는 없을 듯 하다.
하지만 많은 소비자들은 라지(L)로 표시된 옷보다는 스몰(S)사이즈를, 스몰보다는 엑스트라스몰(Extra Small) 사이즈를 구입할 때 설령 실제로 그 치수가 미디움(M) 사이즈 일지라도 무한한 희열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나 사이즈 눈속임이 결국 소비자들의 욕구를 반영한 정책이라는 하이스트리트 업체들의 주장도 나름 일리가 있다.
사이즈의 희생자들
한편 ‘날씬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일부 여성들은 사이즈 눈속임을 통해 매출을 구축하려는 하이스트리트 라벨들과, 날씬한 고객을 타겟으로 제한된 사이즈-심지어 더욱 더 작은 사이즈-만을 내놓고 있는 하이엔드 디자이너 브랜드 사이에서 심리적 혼돈을 느낀다면서 ‘허영의 사이즈’도 ‘그들만의 사이즈’도 아닌 ‘사이즈의 세분화’를 요구하고 있어 사이즈 논란은 더욱 확장될 전망이다.
여기에 미국의 영양학자들과 사회학자들까지 가세, 미국인들의 늘어난 체중과 웨이스트 라인을 반영한 ‘건강한(?)’ 사이즈 표기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주장하고 나서고 있고 체구가 작은 여성들은 또 그들을 위한 “쁘띠(Petite)" 사이즈를 추가하거나 세분화시켜 줄 것으로 요구하는 등 사이즈 논란은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하지만 쁘띠 사이즈나 2-4-심지어 0사이즈 추가는 상대적으로 빠른 반면 사이즈 확대 노력은 여전히 미지근한 상태여서 소비자들은 허영의 사이즈로 정신적 위안을 얻든가, 잔인한 치수의 잣대를 유지하고 있는 디자이너 브랜드를 입기 위해 악착같이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에 놓여있다.
결국 ‘사이즈 눈속임’ 현상은 날씬한 몸매에 대한 강박증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압력의 부산물로 패션 마케팅과 심리학이 만들어낸 교묘한 상술이라 할 수 있다.